시험을 보러 왔던 날의 공기
연세대학교에 처음 왔던 이유는 여행이 아니라 시험이었다. 편입시험을 치르기 위해 방문했었고, 영문학과에 지원했었다. 당시에는 캠퍼스를 둘러볼 여유가 거의 없었다. 시험장 위치를 확인하고, 긴장한 채로 교실에 들어가고, 시험이 끝난 뒤 곧장 돌아갔던 하루였다.
결과는 반쯤 성공이었다. 1차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마지막 단계였던 서류심사에서 탈락했다. 최종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지 못했던 순간이 꽤 오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이후 진학하게 된 곳이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였고, 그렇게 학창 시절의 방향은 조금 다른 길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연세대학교는 단순히 ‘못 간 학교’가 아니라, 선택의 갈림길이 남아 있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만약 이곳에 합격했다면 이후의 시간은 꽤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시간이 꽤 지난 뒤에도 이상하게 남는다.
늦가을 밤,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캠퍼스의 모습이 아니라 그때의 공기였다. 시험을 보러 왔던 날, 긴장감 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이 이제는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밤이 되면 달라지는 캠퍼스
연세대학교의 낮은 관광객도 많고 학생들의 이동도 활발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다. 소음이 줄어들고, 길이 넓게 느껴진다. 특히 백양로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길은 밤에 걷기 좋은 산책로에 가깝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건물들이 부드럽게 드러난다. 캠퍼스의 건물들은 현대식 건물도 있지만,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조명이 강하지 않아도 형태가 또렷하게 드러나고, 낮보다 오히려 건물의 윤곽이 잘 느껴진다.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느려진다. 목적지가 없는 이동이라는 점에서 도시의 거리 산책과도 다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소비하기 위해 이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길이 이어져 있어서 걷게 되는 이동이다.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멈추게 되는 이유
캠퍼스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연세대학교의 역사와 시작을 상징하는 인물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동상은 낮에도 잘 보이지만, 밤에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다가온다.
조명이 강하지 않아서인지 동상이 강조되기보다 주변 공간과 함께 어우러진다. 낮에는 학교의 상징처럼 보였다면 밤에는 한 시대의 흔적처럼 느껴진다. 바로 옆의 건물들과 함께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이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축적해온 장소라는 점이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이 앞에 서 있으니 이상하게 시험을 보러 왔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동상이 있었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긴장한 상태에서 캠퍼스를 걸었고, 풍경을 인식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찾아왔을 때 비로소 그 장소를 ‘보게’ 되는 경험이 생긴다.


담쟁이가 남겨두는 계절의 흔적
연세대학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풍경은 건물 외벽을 따라 이어진 담쟁이 덩굴이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시기라 잎은 거의 말라 있었고 색도 바랜 상태였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이 캠퍼스와 잘 어울렸다.
낮이었다면 단순히 ‘예쁜 캠퍼스’로 보였을 풍경이 밤에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돌벽 위에 얹혀 있는 덩굴의 질감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조명에 따라 그림자가 길게 생긴다. 오래된 건물의 표면과 계절의 흔적이 함께 남아 있는 장면이다.
걷다 보니 시험을 보러 왔던 날의 기억이 겹쳐졌다. 그때는 겨울에 가까운 날씨였고, 캠퍼스의 인상은 차갑고 낯선 공간이었다. 지금은 같은 장소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긴장했던 공간이 아니라, 조용히 산책할 수 있는 장소로 변해 있다.
사람이 장소를 기억하는 방식은 공간 자체보다 그때의 상태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당시에는 결과를 기다리는 장소였고, 지금은 지나온 시간을 떠올리는 장소가 되었다.



지나간 선택지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
연세대학교를 걷는 동안 계속 떠올랐던 생각은 후회라기보다 ‘가능성’에 가까웠다. 만약 이곳에 합격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달라졌을까. 하지만 오래 생각해보면 그런 질문은 답이 없는 질문에 가깝다.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로 진학하면서 지금의 시간들이 이어졌고, 결국 현재의 나를 만든 경로가 되었다. 그래서 이 캠퍼스를 걷는 경험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감정이 아니라, 지나온 선택지를 다시 바라보는 감각에 가깝다.
밤의 캠퍼스는 그 생각을 하기에 적당한 공간이었다. 조용하고, 사람들이 많지 않고, 목적이 없는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종류의 산책이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그냥 걸어도 되는 공간.


기억이 남는 장소의 조건
연세대학교는 관광지로서 특별히 화려한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 장소에는 공통점이 있다. 풍경이 인상적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시간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번 방문은 어떤 의미에서는 늦은 답사에 가까웠다. 과거에 충분히 보지 못했던 공간을 다시 걸어보는 경험. 시험 결과를 기다리던 시기의 감정과, 시간이 지난 뒤의 감정이 한 장소에서 겹쳐졌다.
그래서 이 산책은 단순한 야경 감상이 아니었다. 지나간 시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캠퍼스를 떠날 때는 아쉬움이 남기보다 오히려 정리가 된 감각이 남았다.
어쩌면 어떤 장소는 가보지 못해서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라, 뒤늦게 다시 방문했기 때문에 비로소 기억으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세대학교의 밤 산책은 그런 종류의 방문이었다. 지나간 선택지를 확인하고, 현재의 시간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조용한 산책.
📌 연세대학교
- 📍 주소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 📞 전화번호 : 02-2123-2114
- 🌐 홈페이지 : https://www.yonsei.ac.kr
- 🕒 이용시간 : 캠퍼스 상시 개방 (야간 산책 가능, 건물 내부는 시간 제한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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