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보러 왔던 날의 공기 연세대학교에 처음 왔던 이유는 여행이 아니라 시험이었다. 편입시험을 치르기 위해 방문했었고, 영문학과에 지원했었다. 당시에는 캠퍼스를 둘러볼 여유가 거의 없었다. 시험장 위치를 확인하고, 긴장한 채로 교실에 들어가고, 시험이 끝난 뒤 곧장 돌아갔던 하루였다. 결과는 반쯤 성공이었다. 1차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마지막 단계였던 서류심사에서 탈락했다. 최종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지 못했던 순간이 꽤 오래 기억에 남아 있었다. ...
오차노미즈역2019년의 기억에서, 다시 걷게 된 거리 오차노미즈는 나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주 지나치게 되는 곳’으로 남아 있는 동네다. 2019년 도쿄 여행 당시, 평면 환승이 가능한 구조 덕분에 이동 동선에 자연스럽게 포함됐고, 그 덕에 몇 번이고 이 역을 오가게 되었다. 목적지라기보다는 경유지에 가까웠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에는 또렷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 다시 찾은 오차노미즈는 그때와 같은 자리, 같은 강과 철길을 품고 있으면서도 분위기는 확연히 ...
오모테산도 골목으로 들어서다 오모테산도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가장 먼저 느껴졌던 것은 공간의 밀도였다. 분명 사람은 많았지만, 소음은 생각보다 정제되어 있었고, 발걸음의 속도도 각자 달랐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천천히 걷는 사람도 있었다. 쇼핑을 목적으로 온 사람, 약속 장소로 향하는 사람, 그리고 우리처럼 특별한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사람들까지, 이 거리에는 여러 개의 시간대가 동시에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함께 이동하던 ...
우에노에서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아침부터 하루 종일 함께 움직였던 일본인 지인과 헤어진 뒤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전철을 타고 미나미센쥬역에 내려, 익숙해진 동네 골목을 따라 숙소로 향하는 길은 묘하게도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만큼 이 동네가, 그리고 이 길이 이미 몸에 익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이 결국 우리 ...
시오도메 지하 라이브 공연장을 천천히 둘러보고 난 뒤, 우리는 신바시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명확한 목적지가 있어서 움직였다기보다는, 비가 그친 뒤의 도쿄 도심을 조금 더 걷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공연을 보고 난 직후의 시간은 항상 그렇듯, 어디론가 바로 향하기보다는 잠시 여운을 정리하고 싶은 순간이 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진 동선 끝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 하나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신바시역 ...
그래피티 앞에서 멈춰 서다 홍대 레드로드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멈추는 건 건물 자체다. 화려하게 꾸민 간판보다, 오래된 외벽 위에 덧입혀진 그래피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온맘씨어터가 자리한 이 건물 역시 마찬가지다. 바로 옆 플레이그라운드 건물과 이어지는 이 일대는, 홍대 특유의 자유로운 에너지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구간이다. 아침 시간대의 레드로드는 비교적 조용하지만, 그래피티는 그 조용함과는 어울리지 않게 또렷하다. 밤의 소음과 사람들의 ...
전쟁을 규칙으로 번역하다 임진왜란은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설명을 요구하는 전쟁이자, 동시에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전쟁이기도 하다. 외침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하기에는 내부의 붕괴가 너무 깊었고, 영웅 서사로만 묶기에는 수많은 실패와 오판이 겹쳐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전쟁을 하나의 ‘놀이’로 옮긴다는 발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용기를 요구한다. 역사 보드게임 〈칼을 찬 선비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게임은 임진왜란을 미화하지도, 단순화하지도 않는다. 대신 ...
넬의 “Stay”는 단순한 사랑의 고백을 넘어, 정체성과 기억, 감정의 회복을 다룬 심오한 내러티브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2002년에 발매된 정규 1집 Let it Rain의 타이틀곡으로, 넬은 이 곡을 통해 서태지컴퍼니와의 협업을 시작으로 메이저 데뷔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넬이 그려낸 음악은 당시 한국 인디 음악의 정서를 대표하는 한 축을 차지하며, 모던 록의 아우라 속에서 독특한 감성적 울림을 전달한다. “Stay”는 음악적 색채와 감성적 깊이를 ...
2024년 11월 3일, 기억을 노래하는 자리‘LIVE FOR LIFE 음악채(音楽彩)’ 카노우 미유 2024년 11월 3일, 도쿄 주오구 니혼바시에 위치한 니혼바시 미츠이 홀은 평소와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이곳에서 열린 「2024 LIVE FOR LIFE 音楽彩 혼다 미나코 메모리얼」은 단순한 기념 공연이 아니었다. 음악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하고,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건네는 자리였다. 공연장은 오후 4시 30분 ...
경상남도 진주시에서는 매년 가을이 되면 두 개의 축제가 함께 열린다. 하나는 지역 예술 행사인 개천예술제,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진주 남강 유등축제다. 보통은 10월에 열리는 축제지만, 2021년에는 코로나 상황으로 일정이 크게 바뀌었다. 가을이 아닌 겨울, 12월로 연기되어 진행되었다. 겨울에 열리는 유등축제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유등이라고 하면 따뜻한 밤공기와 강변 산책이 떠오르는데, 계절은 이미 겨울 초입이었다. 사실 이번 진주 방문도 축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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