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마지막 목적지
연희동 궁동공원 산책을 마무리할 즈음,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마지막 장소를 향했다. 일부러 동선을 짠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곳이 하루의 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는 생각이 든다. 연희동 104고지 전적비. 낮 동안의 산책이 현재의 서울을 걷는 시간이었다면, 이곳은 과거의 서울과 마주하는 지점에 가까웠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진 뒤였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난 깊은 밤은 아니었지만, 빛은 빠르게 힘을 잃고 있었고, 하늘과 도시는 서로의 경계를 흐릿하게 섞어가고 있었다.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스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시간대였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도 분명히 있었다.

주거지 위에 놓인 기억의 자리
이곳이 인상 깊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전적비의 위치였다. 아주 멀리 떨어진 산속이나 외곽이 아니라, 평범한 주거지역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골목을 지나고, 익숙한 아파트와 주택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전혀 다른 성격의 공간이 나타난다. 아이들이 살고, 사람들이 잠드는 동네 위에 전쟁의 기억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다가왔다.
이질적인 두 풍경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아래에서는 일상이 이어지고, 이 고지 위에서는 과거의 시간이 멈춘 채 남아 있다. 이런 배치는 의도된 것처럼 느껴졌다. 기억은 멀리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상 가까이에 두어야 한다는 메시지처럼 보였다.


104고지라는 이름의 무게
전적비 앞에 서서 설명문을 읽으며, 왜 이곳이 ‘104고지’라 불리는지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되었다. 숫자는 단순한 표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고지에 올라서니 시야가 확 트였다. 서울 서쪽 방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이곳이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였는지 몸으로 느껴졌다.
1950년 9월 21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서울 탈환을 목표로 진격하던 해병대는 이곳에서 북한군과 맞섰다. 서울의 서쪽 관문이었던 104고지는 그 자체로 최후 방어선이었다. 북한군은 이 일대를 요새화하며 난공불락을 호언했고, 해병대는 결사적인 반격으로 맞섰다. 3주간 이어진 혈전 끝에 한 개 중대 중 단 26명만이 생존했다는 기록은, 숫자만으로도 쉽게 삼켜지지 않는다.
이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단순한 지형 확보가 아니라, 서울 시민 구출의 선도를 여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이 전투의 의미는 더욱 무겁다. 해병 제1대대의 조기 탈환은 수도 탈환 작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치러진 희생은 지금 이 자리를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다.
해가 진 뒤에야 선명해진 생각
해가 완전히 떨어진 뒤의 104고지는 낮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밝은 조명 아래 웅장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조용히 서 있는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생각도 자연스럽게 무거워진다. 이곳에 서서 웅장함이나 자부심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이분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산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상처럼 받아들인다. 너무 익숙해서, 그 자유가 얼마나 많은 희생 위에 놓여 있는지 잊고 지내기 쉽다. 하지만 이 고지에 서니, 자유라는 단어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사람들의 선택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서울을 내려다보는 자리에서
고지에 서서 내려다본 서울의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완벽한 야경은 아니었고, 사진으로 담기기에는 애매한 시간대였다. 빛은 충분히 어둡지 않았고, 그렇다고 낮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애매함이 이 장소와 잘 어울렸다. 전쟁과 평화, 과거와 현재, 희생과 일상이 겹쳐 있는 시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과 도로 위를 흐르는 차량들을 바라보며, 이 평범한 장면이 얼마나 많은 대가 위에 놓여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저 막히는 길일 뿐인 도로도, 그 시절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길이었을 것이다.

하루를 닫는 방식
연희동 104고지 전적비는 하루의 산책을 마무리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장소였다. 궁동공원에서 느꼈던 여유와 풍경이 현재의 서울이라면, 이곳은 그 서울이 만들어진 과정을 되돌아보게 하는 자리였다. 조용히 서서, 설명문을 읽고, 잠시 내려다보고, 그리고 다시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곳은 오래 머물 필요도, 많은 말을 할 필요도 없는 장소다. 다만 한 번쯤 올라와서, 지금의 삶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애매한 야경이어서 조금 아쉬웠지만, 그마저도 이 장소의 성격과 잘 어울렸던 저녁이었다.
📌 서울 연희동 104고지 전적비
- 📍 주소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
- 📞 전화번호 : 별도 없음
- 🌐 홈페이지 : 별도 없음
- 🕒 이용시간 : 상시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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