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롱 새 공원에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오후 일정은 자연스럽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계획했던 동선은 이미 흐트러졌고, 몸은 제법 무거워진 상태였다. 주롱 새 공원 앞에서 버스를 타고 분레이(BOON LAY) 역으로 이동한 뒤, 다시 동서선(East West Line)을 타고 도심으로 돌아왔다. 이동 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지하철에 몸을 맡기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원래의 계획은 차이나타운이었다. OUTRAM PARK 역에서 보라색 노선으로 갈아타면 무리 없이 갈 수 있었지만, 졸음에 취해 몇 정거장을 지나쳐 버렸다. RAFFLES PLACE 역에서 내려 노선도를 다시 확인하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미 지나친 동선, 억지로 되돌리기보다는 흐름을 바꾸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목적지는 자연스럽게 부기스(Bugis)로 바뀌었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 있는 지역, 부기스
부기스는 싱가포르 도심 북동쪽에 자리한 지역으로, 지금은 트렌디한 쇼핑과 스트리트 문화로 알려져 있지만 과거의 결은 전혀 달랐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 일대는 트랜스우먼들이 모이는 거리로 인식되던 공간이었다. 당시의 부기스는 싱가포르에서도 가장 독특하고, 동시에 논쟁적인 지역 중 하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싱가포르 정부는 이 일대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한다. 대형 쇼핑몰과 레스토랑, 호텔이 들어서고, MRT 부기스역이 생기면서 공간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었다. 과거의 흔적은 표면에서 거의 사라졌고, 대신 지금의 부기스는 오차드 로드와는 또 다른 방향의 쇼핑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부기스의 인상은 ‘고급’보다는 ‘활기’에 가깝다. 오차드 로드가 브랜드와 정제된 소비의 공간이라면, 부기스는 좀 더 즉각적이고, 젊고, 현지적인 에너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부기스 정션 — 실내처럼 설계된 거리
부기스를 대표하는 공간을 하나 꼽자면 단연 부기스 정션이다. 부기스 정션은 전통적인 쇼핑몰이라기보다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을 유리 천장으로 덮어 만든 독특한 구조의 상업 공간이다. 위로는 천장이 있지만, 아래를 걷다 보면 실내인지 실외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이 구조는 싱가포르의 기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덥고 습한 날씨, 잦은 소나기 속에서도 사람들이 무리 없이 걷고 소비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실제로 부기스를 걷던 날도 비가 내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했지만, 이동에 큰 불편은 없었다. 싱가포르의 상업 공간이 얼마나 기후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는지를 체감하게 되는 지점이었다.
부기스 정션 안에는 소규모 패션 브랜드부터 식당, 카페까지 다양한 상점들이 밀집해 있다. 쇼핑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공간이다.


부기스 플러스 — 대형 몰 속의 의외성
부기스 정션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곳에는 부기스 플러스가 있다. 이곳은 보다 전형적인 대형 쇼핑몰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익숙한 글로벌 브랜드와 푸드코트, 엔터테인먼트 시설들이 층층이 배치되어 있다.
흥미로웠던 점은 상층부에 위치한 오락 공간이었다. 우리나라의 오락실과 유사한 공간이었지만, 그 구성은 꽤 달랐다. 디지털 게임 위주인 한국과 달리, 링 던지기나 메모리 게임처럼 사람의 감각과 참여를 전제로 한 아날로그 게임들이 눈에 띄었다. 마치 오래전 놀이 공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듯한 인상이었다.
이런 장면들은 싱가포르가 단순히 ‘최신 도시’가 아니라, 과거의 요소를 완전히 지우지 않고 현재와 나란히 배치하는 도시라는 느낌을 준다. 부기스 플러스는 그 대비가 특히 잘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부기스 스트리트 — 가장 즉각적인 싱가포르
부기스의 또 다른 얼굴은 부기스 스트리트다. 쇼핑몰의 정돈된 분위기에서 몇 걸음만 벗어나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부기스 스트리트는 말 그대로 시장에 가깝다. 좁은 통로를 따라 상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옷, 기념품, 음식, 음료가 뒤섞여 있다.
이곳에서는 싱가포르의 가장 일상적인 소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고, 관광객과 현지인이 뒤섞여 있다. 필자는 이곳에서 두리안 음료를 하나 골랐다. 가격은 2 싱가포르 달러. 호기심 반, 경험 반이었다.
결과적으로 맛은 호불호가 확실히 갈릴 수밖에 없었다. 암모니아에 가까운 향이 먼저 치고 올라왔고, 음료 자체의 달콤함은 그 뒤에 따라왔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다시 찾을 맛은 아니었지만, 싱가포르라는 장소를 경험했다는 느낌만큼은 분명했다. 두리안이 호텔 반입 금지 품목이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함께 실감했다.
부기스에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세계
부기스의 장점은, 이 지역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보로 5~10분만 이동하면 아랍 스트리트와 하지 레인이 이어진다. 공간의 분위기는 부기스와 또 한 번 달라진다.
아랍 스트리트의 중심에는 술탄 모스크가 자리 잡고 있다. 황금빛 돔과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이슬람 문화권의 상점과 레스토랑이 모여 있다. 향신료 냄새, 전통 의상, 아랍풍 인테리어가 어우러지며, 싱가포르 안에 또 하나의 도시가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 레인은 그 옆에서 전혀 다른 결을 보여준다. 좁은 골목 양옆으로 개성 강한 편집숍과 카페, 그래피티가 이어진다. 젊고 실험적인 분위기가 강한 공간으로, 부기스의 쇼핑몰과는 또 다른 방식의 ‘트렌디함’을 보여준다.


부기스라는 선택
이날의 부기스 방문은 계획된 일정이 아니었다. 주롱 새 공원에서의 시간 초과, 지하철에서의 졸음, 지나쳐버린 환승역. 모든 것이 겹쳐 만들어진 선택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우연은 꽤 만족스러운 방향으로 흘러갔다.
부기스는 싱가포르의 여러 얼굴을 한 번에 보여주는 공간이다. 과거와 현재, 쇼핑몰과 시장, 글로벌 브랜드와 로컬 문화, 그리고 아랍 스트리트와 하지 레인까지. 이 모든 것이 큰 거리 이동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오차드 로드가 싱가포르의 ‘정제된 표정’이라면, 부기스는 그 이면의 움직임에 가깝다. 조금 더 소란스럽고, 조금 더 즉흥적이며,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계획을 벗어난 오후였지만, 싱가포르라는 도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 장소 정보 — 부기스(Bugis)
- 📍 주소: 3 New Bugis Street, #03-01, Singapore 188867
- 📞 전화번호: +65 6338 9513
- 🌐 부기스 스트리트 공식 홈페이지: https://www.bugisstreet.com.sg
- 🚇 MRT: Bugis Station (Downtown Line / East West Line)
- 🏬 주요 스폿: Bugis Junction, Bugis Plus, Bugis Street Market
- 🕌 도보 이동 가능 지역: Arab Street, Haji Lane, Sultan Mos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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