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을 떠올리면 대부분은 바다부터 생각한다. 경포대, 안목해변, 카페거리 같은 이름들이 먼저 떠오르고, 역사 유적은 보통 여행의 ‘옵션’ 정도로 취급된다. 그런데 강릉에서는 순서가 조금 다르다. 바다로 가기 전에 먼저 들르게 되는 장소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오죽헌이다.
오죽헌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한국사 교과서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공간이다. 신사임당의 친정집이자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지폐에서 5만 원권의 인물과 5천 원권의 인물이 바로 이 집에서 이어진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인데, 모자(母子)가 동시에 화폐 도안이 된 경우는 사실상 유일하다. 그래서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라 ‘한 번은 와야 하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다시 찾게 된 이유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기억은 아마 수학여행이었던 것 같다. 다만 정확한 장면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학생 때의 문화유적 방문은 대부분 그렇다. 분명 왔는데, 무엇을 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2022년에 강릉 여행을 하며 다시 들렀을 때 비로소 장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옥의 구조, 뒤쪽 숲, 마당의 공간감 같은 것들이 그제야 보였다. 그리고 2023년, 생각보다 빨리 다시 오죽헌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개인 여행이 아니라 미국 국무부 장학생 프로그램 일정의 일부였다. 프로그램을 마무리하는 졸업여행 성격의 일정이었고, 강릉 일정의 첫 장소가 오죽헌이었다.

문화해설과 공간의 이해
이번 방문에서는 문화해설을 미리 예약했다. 혼자 여행할 때는 대충 둘러보고 사진만 찍어도 충분하지만, 외국 학생들과 함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간을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오죽헌의 문화해설은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고, 배정된 해설사가 일정 시간 동안 함께 이동하며 설명을 해준다. 해설은 한국어로 진행된다. 보통은 실내외를 오가며 설명을 듣게 되는데, 방문했던 날은 폭염 경보가 내려진 한여름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설명은 실내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해설을 통해 단순히 “율곡 이이의 생가”라는 문장으로는 이해되지 않던 부분들이 정리되었다. 오죽헌이라는 이름이 집 주변에 자라는 검은 대나무(오죽)에서 유래했다는 점, 건물이 단순한 양반가가 아니라 당대 사대부 가문의 생활 구조를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점, 그리고 신사임당의 삶이 단순히 ‘현모양처’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학생들에게도 반응이 좋았다. 교과서식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 형태로 전달되자,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실제 사람이 살았던 공간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시립박물관과 특별전시
오죽헌을 둘러본 뒤 이어서 방문한 곳은 같은 부지에 있는 시립박물관이었다. 상설전시관은 강릉 지역의 역사와 생활문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실 이날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은 곳은 따로 있었다.
특별전시관에서 진행되던 전시, “나한, 마음이 이르는 얼굴”이었다.
전시는 2023년 6월 29일부터 8월 31일까지 진행되었고, 우리가 방문한 날은 8월 초였다. 더위 속에서 야외 이동을 계속하다가 들어간 전시실은 의도적으로 어둡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바깥의 열기와 소음이 사라지고, 공간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한’이라는 존재
‘나한’은 불교에서 아라한(arhat)에서 유래한 말이다.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를 의미한다. 흔히 오백나한이라 부르는데, 이는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부처가 열반한 이후, 그 가르침을 정리하고 전승한 존재들이다.
전시에 나온 나한상들은 2001년 강원 영월 창령사지에서 수습된 유물로 알려져 있다. 나한전(羅漢殿)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상들인데, 특징이 분명했다. 모두 얼굴이 다르다.
눈을 감은 얼굴, 생각에 잠긴 얼굴, 미소 짓는 얼굴, 어딘가 지친 표정, 합장한 손, 염주를 쥔 손. 규격화된 불상이 아니라 사람의 표정에 가깝다. 그래서 불교 조각이라기보다 인물 조각처럼 느껴진다.


어두운 방에서 느껴지는 것
전시실은 밝지 않았다. 조명은 최소화되어 있었고, 각각의 나한상에만 빛이 닿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보는’ 느낌보다 ‘마주 보는’ 느낌이 강했다.
여행 일정의 시작점이었는데, 오히려 가장 조용한 장소였다. 바다로 가기 전, 카페를 가기 전,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잠깐 멈춰 서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학생들도 이 전시실에서는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해되는 분위기였다.
이 전시를 보고 나서야 오죽헌 방문이 단순한 역사 유적 관람이 아니라 여행의 시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장소가 여행의 방향을 결정해준 셈이었다.


여행의 시작점
강릉 일정은 이후 바다와 시내로 이어졌지만, 기억에 남는 출발점은 오죽헌과 나한 전시였다. 보통 여행의 시작은 이동이나 식사로 기억되는데, 이번에는 조용한 전시실이었다.
관광지로서의 강릉은 바다에 있지만, 도시의 시간은 오죽헌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해준 장소가 시립박물관이었다. 바다로 향하기 전 잠시 속도를 늦추게 만드는 장소였다.
📌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
- 📍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 ☎️ 전화 : 033-660-3301
- 🕒 운영시간 : 매일 09:00 – 18:00 (입장 마감 17:00)
- 🌐 홈페이지 : https://www.gn.go.kr/museum/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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