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해 보이는 싸움이 야구를 바꾼다
이용규의 ‘용규놀이’
2025년 현재, 이용규는 더 이상 ‘선수’로 그라운드에 서 있지 않다. 키움 히어로즈의 플레잉 코치로서, 그는 이제 타석에 들어가기보다 더 많은 시간을 덕아웃과 훈련장, 그리고 경기 흐름을 읽는 위치에서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용규라는 이름은, 유니폼에서 빠졌다고 해서 곧바로 야구장에서 사라질 수 있는 종류의 이름은 아니다. 빠른 발이나 장타력, 혹은 화려한 수비 장면으로 기억되는 선수이기도 했지만, 그는 한 타석이 경기 전체의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가장 집요하게 증명해 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용규의 야구는, 선수 시절이 끝난 지금에도 여전히 ‘플레이’로 남아 있다.
그를 설명할 때 따라붙는 말, ‘용규놀이’는 단순한 별명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어느 순간부터 야구 팬들 사이에서 하나의 개념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상대 투수를 괴롭히는 타석, 투구 수를 비정상적으로 늘리는 승부, 그리고 결과보다 과정이 더 많은 이야기를 남기는 타석. 이것이 바로 이용규가 만들어낸, 그리고 야구 팬들이 이름을 붙인 플레이의 정체다.
‘잘 치는 타자’와는 다른 방향의 가치
이용규는 전형적인 장타자는 아니다. 홈런 숫자로 상대를 압도하는 선수도 아니다. 대신 그는 오랫동안 1번 타자로 기용되며, 출루와 흐름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아왔다. 이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타 하나보다도, 타석 하나가 가진 밀도다.
야구에서 투수는 리듬의 스포츠를 한다. 투구 수가 늘어날수록, 리듬은 흔들리고 선택지는 줄어든다. 이용규는 이 점을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볼을 고르고, 스트라이크를 파울로 걷어내고, 쉽게 끝낼 수 있는 승부를 끝까지 늘인다. 이 과정에서 관중은 종종 묻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하지만 이 질문은 이미 방향이 잘못됐다.
이용규의 타석은 개인의 성적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투수와 팀 전체를 상대로 한 싸움에 가깝다. 안타를 치지 못해도, 그 타석이 투수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성공한 타석이 된다.
‘용규놀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
‘용규놀이’라는 표현은 투 스트라이크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인 타자라면, 이 시점에서 승부를 빨리 끝내려 한다. 그러나 이용규는 이 순간부터 다른 계산을 시작한다. 스트라이크 존의 경계에 걸친 공, 애매한 코스의 공을 정확히 커트해낸다. 정타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아웃을 미루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투수는 점점 불리해진다. 구종은 노출되고, 체력은 빠져나가며, 다음 타자를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결국 한 타석이 투수 교체를 불러오고, 불펜을 조기에 소모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것이 ‘놀이’라는 단어로 불리게 된 이유다. 단순한 파울이 반복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고, 계산이 있으며, 결과가 남는다. 그리고 이 장면이 반복되면서, 팬들은 어느 순간부터 이 상황을 하나의 패턴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 타석 20구, 기록이 된 순간
‘용규놀이’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기록으로 각인된 순간이 있다.
2010년 8월 29일, 기아 타이거즈 시절의 이용규는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투수 박준규를 상대로 무려 20구 승부를 펼쳤다. 8회말, 승부처에서 벌어진 이 타석은 결과적으로 플라이 아웃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아웃’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0개의 공을 던진 박준규는 결국 이 타석 이후 마운드를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 타자를 잡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소모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 기록은 KBO 역사상 한 타자를 상대로 던진 최다 투구 기록으로 남았다.
중요한 점은, 이 장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에도 17구 승부가 있었고, 이후에도 비슷한 장면이 이어졌지만, 이용규의 20구 타석은 ‘의도된 반복’이라는 점에서 특별했다.
- 투수 박준규 VS 타자 이용규 “한 타석 20구 경기 장면“ : https://m.sports.naver.com/video/11726
아웃이어도 이득이 되는 타석
야구에는 종종 직관과 어긋나는 진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아웃이지만 이득이 되는 타석”이다. 일반적으로 타자는 아웃을 피해야 하지만, 팀 단위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 타석에서 10구 이상을 소모하게 만들었다면, 그 타석은 이미 역할을 다한 셈이다.
이용규의 타석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가치를 가진다. 투수의 구종을 노출시키고, 다음 타자에게 정보를 남기며, 불펜을 앞당긴다. 이 모든 것은 기록지에는 남지 않지만, 경기의 흐름에는 분명히 남는다.
그래서 이용규의 성적표를 숫자로만 보면, 이 선수의 가치는 종종 과소평가된다. 그러나 현장에서, 그리고 더그아웃에서는 이 타석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메이저리그에도 있었던 ‘용규놀이’
이런 장면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물게 등장한다.
2004년 5월 19일, 알렉스 코라는 투수 맷 클레멘트를 상대로 18구 승부 끝에 홈런을 만들어냈다. 이 장면은 단순한 홈런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끈질긴 승부 끝에 만들어낸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후 2018년에는 브랜든 벨트가 1회부터 무려 21구를 소모하는 타석을 만들어내며, 메이저리그 최다 투구 타석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결과는 아웃이었지만, 이 장면 역시 ‘기록으로 남는 집요함’의 사례로 남았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에서 이런 장면은 어디까지나 예외다. 반면 이용규는 이런 타석을 자신의 스타일로 반복해왔다는 점에서 다르다.
왜 ‘용규놀이’는 하나의 언어가 되었는가
‘용규놀이’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한 선수의 특이한 플레이를 넘어서 야구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안타가 아니어도, 홈런이 아니어도, 팀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는 많지 않다.
이용규의 타석은 늘 길었고, 종종 답답했으며, 때로는 결과가 없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분명히 상대를 지치게 했고, 경기를 흔들었다. 그래서 팬들은 이 장면을 기억했고, 이름을 붙였으며, 하나의 문화처럼 소비하기 시작했다.
결론 — 타석 하나로 흐름을 바꾸는 선수
이용규의 ‘용규놀이’는 화려하지 않다. 하이라이트 영상에서 자주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플레이는 야구가 단순한 결과의 스포츠가 아니라, 과정의 스포츠라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준다.
빠르게 끝내지 않는 선택, 쉽게 물러나지 않는 태도, 그리고 팀을 위해 자신을 소모하는 방식. 이것이 바로 이용규가 오랜 시간 그라운드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래서 ‘용규놀이’는 놀이라는 말과 달리, 매우 진지한 야구의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를 가장 오래, 가장 정확하게 사용해온 사람이 바로 이용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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