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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 — 하라주쿠 RUIDO ‘카노우 미유 솔로 콘서트’

이번 공연의 세트리스트는 총 14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순히 곡 수만 놓고 보면 아주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한 곡 한 곡이 가진 밀도와 맥락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번 공연이 일본에서 진행된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서는 자연스럽게 한국어와 일본어가 섞이며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점이었다.

TERMINAL

이번 도쿄 여행의 모든 동선과 리듬은 사실상 이 밤을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더운 7월의 하라주쿠, 카페를 두 번이나 옮겨 다니며 시간을 버텨낸 이유도, 숙소를 굳이 사메즈역 쪽으로 잡았던 선택도, 결국은 이 공연 한 편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해가 기울 무렵, 우리는 하라주쿠의 언덕길 위에 자리한 RUIDO 앞에 다시 모였다.


오후 4시, 조용히 시작된 굿즈 판매

굿즈 판매는 오후 4시부터 시작되었다. 공연장 앞에 도착했을 때 자연스럽게 “줄이 길겠지”라고 생각했다. 공연이 있는 날의 굿즈 부스는 늘 작은 전쟁처럼 굴러가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날의 하라주쿠는 의외로 차분했다. RUIDO 입구 쪽으로 사람들이 모이긴 했지만, 누군가를 밀어내며 서둘러야 할 정도의 혼잡은 아니었고, 줄도 ‘길게 늘어선다’기보다는 ‘필요한 사람만 조용히 모인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 덕분에 오히려 실감이 났다. 아, 오늘은 정말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의 날이구나. 굿즈는 그 공연을 앞두고 자연스럽게 거쳐가는 의식 같은 것이고, 모두가 그 리듬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이번 공연에서 판매되는 굿즈는 네 가지였다. 티셔츠, 타올, 키링, 그리고 체키. 체키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가 새로 나온 구성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또 비슷한 구성 아닐까?” 하고 넘길 수도 있었는데, 막상 테이블 위에 펼쳐진 실물을 보니, 그날의 공연 제목과 분위기를 의식한 디자인이라는 게 바로 느껴졌다. 가격은 대략 티셔츠 3,500엔, 타올 2,500엔, 키링과 체키가 각각 1,000엔 선. 숫자만 놓고 보면 순간적으로 ‘오…’ 싶은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정도는 금방 납득이 됐다. 일본에서 굿즈 가격은 어느 순간부터 단순한 “물건 값”이 아니라, 무대와 연결되는 통행료 같은 것으로 굳어져 버린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행지에서 기념품 하나 산다고 생각하면, 이 정도는 오히려 “딱 그럴듯한 선”으로 받아들여지는 가격대이기도 했다.

문제는 티셔츠였다. 사이즈가 L 단일이었다. 이게 굿즈 티셔츠에서 자주 보이는 함정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도, 실제로 입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으면 손이 망설여진다. 특히 여행 중에는 짐도 늘어나고, 옷은 결국 ‘실사용’이냐 ‘기념’이냐로 갈리는데, 그 경계가 애매할 때 사람이 가장 오래 고민하게 된다. 나도 딱 그 상태였다. 티셔츠를 살지 말지, 마음은 이미 반쯤 넘어가 있었는데 마지막 한 걸음이 남아 있는 느낌. “어차피 한국 돌아가면 잘 안 입을 수도 있잖아” 같은 계산이 머릿속에서 슬쩍 고개를 들기 시작할 때였다.

그런데 그 순간, 굿즈 판매를 담당하던 스태프가 말을 걸었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잠깐 멈칫했는데, 곧 기억이 났다. 가와사키 니쿠마츠리에서 굿즈를 팔던 그 사람이었다. 그때도 친절한 응대가 인상적이어서, ‘아, 저 스태프 기억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 이런 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팬 입장에서는 은근히 크게 작용한다. 공연이 다르고 장소가 바뀌어도, 누군가의 태도나 표정이 “지난 기억”을 끌어올리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이 토끼 디자인, 미유가 직접 했어요.” 그 말은 정보라기보다 거의 압박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걸 안 사면, 네가 오늘 여기까지 온 의미가 약간 흐려진다’고 말하는 듯한.

결국 나는 체키를 제외한 모든 굿즈를 구입했다. 티셔츠까지 포함해도 총액은 7,000엔 정도. 계산을 끝내고 쇼핑백을 손에 쥐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굿즈를 샀다”는 사실보다, 이제 정말 공연을 볼 준비가 됐다는 감각이 더 컸다. 공연 시작 전의 시간은 늘 애매하게 공중에 떠 있는데, 굿즈 구매 같은 작은 행동 하나가 그 떠 있는 시간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손에 남는 무게,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계산을 마친 뒤의 짧은 안도감. 그런 것들이 모여서, 이 밤이 ‘실제로 시작되었다’는 신호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쇼핑은 그날 이후의 나에게 남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사진도 영상도 남길 수 없는 공연이라면, 결국 남는 건 기억이고,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물건 하나가 있으면 기억이 덜 흐려진다. 언젠가 티셔츠를 꺼내거나 키링을 만지는 순간, 오늘의 하라주쿠와 RUIDO의 입구가, 그리고 “TERMINAL”이라는 제목이 다시 떠오르는 식으로 말이다. 굿즈는 결국 물건이 아니라, 그날의 시간을 다시 호출하는 작은 버튼 같은 것이었다.


입장 전 대기, 더위와 인내의 시간

굿즈를 구입하고 나서도 공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쇼핑백을 손에 쥔 채 공연장 근처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지만, 공연장 스태프의 안내는 단호했다. 입장 대기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공연장 주변에 머무르지 말아 달라는 요청. 이해는 되었지만, 마땅한 대안이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다시 하라주쿠의 거리로 흩어지는 것. 공연을 보러 왔지만, 정작 공연장 앞에 머물 수는 없는, 묘하게 어정쩡한 시간대였다.

7월의 도쿄는 생각보다 훨씬 집요했다. 단순히 “덥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날씨였다. 공기가 눅눅하게 피부에 달라붙었고, 잠시 그늘에 서 있어도 땀이 식을 틈이 없었다. 햇볕 아래에서는 몇 분만 서 있어도 셔츠 안쪽이 금세 젖어 들었고,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몸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공연을 보기 위해 체력을 아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미 몸은 서서히 소모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대기 시간이 완전히 낭비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연의 일부처럼 받아들여졌다. 중요한 무언가를 앞두고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구간, 불편하고 애매한 시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기다려야 하는 이 시간이, 오히려 기대감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정말 중요하지 않았다면, 이 더위를 핑계로 어딘가에서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버티고 있었다. 그 자체가 이미 답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휴대폰을 확인하고, 물을 마시고, 그늘을 찾아 이동하는 단순한 동작이 반복됐다. 누군가는 말수가 줄어들었고, 누군가는 괜히 웃으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빨리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과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는 체념이 뒤섞인 감정. 그렇게, 입장 시간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입장 번호 52번, 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번 공연의 티켓은 티켓보(TICKET BOARD)를 통해 예매했다. 일본 공연에서 익숙한 방식, 먼저 추첨을 통해 관람 자격을 얻고, 그 다음 랜덤으로 입장 번호가 부여되는 구조다.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의 감정은 늘 비슷하다.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튀어나오고, 숫자 하나에 그날의 경험이 상당 부분 좌우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체감하게 된다.

내 번호는 52번이었다. 숫자를 보는 순간, 바로 현실이 계산됐다. 스탠딩 공연에서 52번은 결코 유리한 위치가 아니다. 이미 앞에 50명 이상이 들어간다는 뜻이고, 무대 바로 앞을 기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번호다. 더 아쉬웠던 건, 이번 티켓이 S티켓이었다는 점이다. 가장 좋은 등급의 티켓을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결국 랜덤이었다. 같은 가격을 내고도 누군가는 앞번호를, 누군가는 뒷번호를 받는 구조. 이 시스템의 공정함과 불공정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지점이었다.

입장이 시작되자 번호 순서대로 사람들이 하나씩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1번, 2번, 10번, 20번. 숫자가 불릴 때마다 무대 앞이 점점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장면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앞자리는 이미 사람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5열 언저리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시야였다. 앞에 체격이 큰 사람들이 서 있었고, 공연장은 단차가 없는 구조였다. 고개를 조금만 잘못 들면 무대가 가려졌고,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주변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는 밀도였다. 이쯤 되니 선택지가 떠올랐다. 비슷한 번호를 받은 다른 팬들처럼 아예 뒤쪽으로 물러나 비교적 편하게 공연을 볼 것인가, 아니면 이 애매한 위치에서 끝까지 버틸 것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탠딩 공연의 묘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만들어진다. 공연이 시작되면 관객들의 집중도와 움직임이 달라지고, 자연스럽게 위치가 조금씩 재배열된다. 처음부터 완벽한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해서, 끝까지 그 위치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실제로 공연이 진행되면서 밀도는 점점 더 높아졌고, 스태프가 앞으로 조금 더 밀착해 달라는 안내를 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공연장에서는 안전을 이유로 “더 이상 앞으로 오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날은 오히려 반대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최대한 밀착해 달라는 요청. 그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앞으로 이동했고, 어느 순간 4열, 체감상 3.5열쯤 되는 위치에 서 있게 되었다.

완벽한 시야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불만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이 자리까지 온 것도 결국은 선택의 결과였다. 뒤로 물러나지 않고 버텼고, 그 덕분에 무대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 순간,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의 공연은 ‘완벽한 자리’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순간, 조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었다. 모든 불편함과 더위, 애매함은 곧 음악으로 덮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촬영 불가, 오직 눈과 귀로만

이번 공연 역시 사진과 영상 촬영은 전면 금지였다. 공연장에 들어서며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이미 알고 있던 규칙이기도 했다. 휴대폰을 꺼낼 필요도 없었고, 꺼낼 이유도 없었다. 화면을 통해 남길 기록 대신, 이 밤을 그대로 몸에 담아가야 하는 공연이었다.

처음에는 아쉬움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좋은 순간을 기록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늘 마음 한쪽에 남는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묘하게 다른 감각이 작동하고 있었다. 손에 쥔 휴대폰 대신, 시선은 자연스럽게 무대를 향했고, 귀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긴장한 상태였다. 오히려 기록이 불가능하다는 조건이, 관객을 더 정직하게 공연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입장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공연 시작은 예정 시간보다 조금 지연되었다. 그럼에도 공연장 안에는 조급함보다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무대 뒤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장비 소리, 조명이 바뀌기 직전의 공기. 모든 것이 “곧 시작된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이 좁은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HELLO, TOKYO — 도시의 밤을 여는 첫 곡

조명이 바뀌고, 무대 위에 카노우 미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체로 공연장의 공기가 한 번 더 압축되는 순간이었다. 첫 곡은 오리지널 곡 HELLO, TOKYO.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품은 이 곡으로 공연이 시작되자, 관객석의 분위기는 단번에 바뀌었다.

HELLO, TOKYO는 단순한 오프닝 곡이라기보다는, 이 공연이 어떤 시간과 장소 위에 서 있는지를 선언하는 곡처럼 느껴졌다. 하라주쿠의 밤, 여름의 열기, 그리고 이 공연을 위해 모인 사람들. 그 모든 요소가 이 한 곡 안에서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첫 소절이 울려 퍼지는 순간, 기다림과 더위, 애매한 대기 시간은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곡이 끝나기도 전에 이어진 비밀번호 486, 그리고 지지말아요(負けないで). 쉼 없이 이어지는 구성은 관객을 한 번에 끌어올리기 위한 선택처럼 느껴졌다. 특히 지지말아요에서는 한국어 가사가 자연스럽게 섞였다.

“지지말아요, 봐요 저기에…”

일본 공연장에서 울려 퍼지는 한국어 가사는 단순한 팬서비스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공연이 어떤 경로를 통해 만들어졌고, 어떤 무대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국과 일본, 방송과 라이브, 그룹과 솔로의 시간이 겹쳐지는 지점. 관객석 곳곳에서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한 반응이 느껴졌다.

숨을 고르지 않는 전개, 스탠딩 공연의 온도

이번 공연은 시작부터 끝까지 스탠딩으로 진행되었다. 좌석에 앉아 숨을 고를 틈은 없었고, 관객 역시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게 되었다. 노래가 이어질수록 공연장의 온도는 분명히 올라가고 있었지만, 불편함보다는 몰입감이 먼저 찾아왔다.

곡 사이의 간격은 길지 않았고, 미유는 짧은 멘트 후 곧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그 리듬이 공연을 지배하고 있었다. 관객은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따라가게 되었고, 개인적인 생각이나 잡음이 끼어들 틈은 거의 없었다. 이 공연이 기록이 아닌 ‘체험’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는 물리적으로는 멀지 않았지만, 심리적으로는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호흡이 느껴질 때마다, 이 공연이 단순히 “보는 공연”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지는 시간”이라는 느낌이 강해졌다. 스탠딩 공연 특유의 밀도와 압박감조차도, 이 밤에는 방해 요소가 되지 않았다.


언어를 넘나드는 무대, 노래로 이어진 감정의 흐름

이번 공연의 세트리스트는 총 14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순히 곡 수만 놓고 보면 아주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한 곡 한 곡이 가진 밀도와 맥락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번 공연이 일본에서 진행된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서는 자연스럽게 한국어와 일본어가 섞이며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점이었다.

공연 초반부터 이어진 ‘HELLO, TOKYO → 비밀번호 486 → 마케나이데‘ 이 세 곡은 분위기를 빠르게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특히 마케나이데(負けないで)를 부르는 장면은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한일톱텐쇼에서 불렀던 그 버전 그대로, 일본어 가사 사이에 한국어 가사가 자연스럽게 섞여 나왔다.

  • “지지말아요, 봐요 저기에
  • 내 눈 앞에 꿈은 다 왔어요.
  • 아무리 떨어져 있다 해도
  • 내 마음은 항상 옆에 있어요.”

일본 공연장에서 울려 퍼지는 이 한국어 가사는 단순한 이벤트성 연출이 아니었다. 이 곡을 통해 미유가 지나온 무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쌓아온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따라온 팬들의 기억이 한순간에 겹쳐졌다. 객석에서도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환호의 결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 날 공연의 셋리스트

  1. HELLO, TOKYO
  2. 비밀번호 486
  3. 마케나이데
  4. 마법소녀
  5. ANGEL NIGHT
  6. 로맨틱을 줄게요
  7. 大丈夫だよ。
  8. Re:Road
  9.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10. Shake it Off
  11. 쿠로이신죠
  12. TERMINAL
  13. OVER DRIVE (앵콜)
  14. 사랑의 배터리 (한국어 버전) (앵콜)

‘로맨틱을 줄게요’, 번역이 아니라 선택의 언어

이어서 이어진 로맨틱을 줄게요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인상 깊었다. 원래 가사인 “로맨티쿠 아게루요” 대신, 미유는 “로맨틱을 드릴게요”라는 한국어 가사를 선택해 불렀다. 일본어 가사를 그대로 두고 한국어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언어를 바꿔 노래했다는 점에서 그 선택은 더 분명하게 다가왔다.

이날 공연장에는 한국 팬들이 일부 자리하고 있었고, 미유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어를 억지로 끼워 넣은 느낌이 아니라, 관객을 향한 방향성을 분명히 한 선택처럼 느껴졌다. 일본에서 열리는 공연이었지만, 이 무대가 이미 특정 국가의 언어에만 속해 있지 않다는 선언처럼 들리기도 했다.


무작위 선택이 만든 특별한 순간, 大丈夫だよ。

공연 중반에는 작은 이벤트가 하나 준비되어 있었다. 박스 안에 들어 있는 곡 제목을 랜덤으로 뽑아, 그 곡을 즉석에서 부르는 코너였다. 처음에는 미유가 직접 뽑으려 했지만, 누군가 팬의 이름을 외쳤고, 그 소리를 들은 미유는 아이디어를 바꿔 관객에게 기회를 넘겼다. 선택된 사람은 입장 번호 2번, 1열에서 공연을 보고 있던 한국인 팬이었다.

그가 뽑은 종이에는 大丈夫だよ。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 곡은 카노우 미유의 오리지널 곡 중 하나로, 평소 라이브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곡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곡명이 호명되는 순간, 공연장 안에서도 반응이 한 템포 늦게 따라왔다.

곡을 시작했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기타가 앰프에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연주는 중단되었고, 잠시 장비를 점검한 뒤 곡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흔히 말하면 ‘사고’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공연의 흐름을 깨지 않았다. 오히려 라이브 공연에서만 가능한, 작은 진짜 순간처럼 느껴졌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다.


일본 팬들의 선택, ‘마법소녀’

이날 공연에서 일본 팬들 사이에서 가장 좋은 반응을 얻었던 곡은 단연 마법소녀였다. 공연이 끝난 뒤 일본 팬들이 “오늘 최고는 마호쇼죠였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무슨 곡을 말하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알고 보니 ‘마법소녀’를 일본식 발음으로 부른 것이었다.

마법소녀는 라이브에서 자주 불리는 곡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이 날 무대에서는 그 희소성이 더 크게 작용했다. 곡이 가진 서정성과 약간의 판타지적인 분위기가, 좁은 라이브하우스 공간과 묘하게 어울리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일본 팬들 역시 이 곡을 통해 미유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한 듯한 반응이었다.


추천이 무대가 된 순간,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게 다가온 곡은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였다. 이 곡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가 아니라, 필자가 직접 미유에게 추천했던 곡이었기 때문이다.

DAY6의 원곡은 물론 유명하지만, 특히 싱어게인에서 이젤이 기타를 치며 커버했던 버전이 인상 깊었고, 그 감성이 미유의 음악 스타일과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중, 오래전 미유의 매니저가 팬카페를 통해 ‘미유가 부르면 좋을 한국어 곡’을 추천받았고, 그때 이 곡을 추천했었다.

그 선택이 이렇게 일본의 라이브 공연장에서, 그것도 한국어 가사 그대로 울려 퍼질 것이라고는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일본이라는 공간에서, 한국어로 노래를 듣는 이 장면은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함께 묘한 벅참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추천이 실제 무대가 되는 순간을 직접 마주한다는 것은, 팬으로서 쉽게 겪을 수 없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앵콜곡으로 이어진 밤, OVER DRIVE와 사랑의 배터리

본공연의 마지막 곡이 끝났을 때, 조명은 잠시 어두워졌고 무대 위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공연이 종료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었지만, 사실 그 누구도 이 밤이 여기서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앵콜”의 목소리는, 준비된 절차라기보다 당연한 수순에 가까웠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카노우 미유가 다시 무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어진 앵콜 무대는 OVER DRIVE사랑의 배터리(한국어 버전), 두 곡으로 구성되었다.

OVER DRIVE는 앵콜의 시작으로서 공연장의 온도를 다시 한 번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고, 이어진 사랑의 배터리는 이 밤을 하나의 ‘완결된 기억’으로 묶어주는 곡이었다.

사랑의 배터리는 미유가 속해 있는 그룹 시스(SIS/T)의 대표곡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곡이 앵콜에서 빠질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날은 한국어 버전으로 불렸고, 이미 여러 곡에서 한국어를 섞어왔던 흐름 위에서 이 곡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일본 공연장이었지만, 언어의 경계는 이미 오래전에 허물어진 상태였다.


공연이 끝나도 끝나지 않은 시간, 애프터 토크쇼

이렇게 모든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공연이 끝났다’는 안내가 나왔다. 하지만 그 안내는 모든 관객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S티켓을 구입한 관객들에게는 아직 하나의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바로 애프터 토크쇼였다.

공연이 끝난 직후,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S티켓 관객들은 다시 한 번 공연장 밖으로 나와 대기해야 했다. 토크쇼는 스탠딩이 아닌 좌석 형태로 진행될 예정이었기에, 공연장 내부에 의자를 세팅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대기 시간은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 이미 한 차례 공연을 모두 소화한 뒤였고, 체력도 상당히 소모된 상태였기에, 그 기다림은 유난히 더디게 흘러갔다.

하지만 결국 준비는 완료되었고, 다시 공연장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무대의 분위기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조명도, 공기의 밀도도 훨씬 차분해졌고, 이제는 노래가 아니라 말로 소통하는 시간이 시작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츠코의 등장, 그리고 익숙한 구호

애프터 토크쇼의 MC는 한일가왕전과 한일톱텐쇼에서 함께 활약했던 나츠코가 맡았다. 나츠코가 먼저 무대에 등장했고, 잠시 후 미유를 부르기 위해 관객들과 함께 익숙한 구호를 외쳤다.

“세카이데 이치방!”

공연 내내 수십 차례 울려 퍼졌던 이 구호가 다시 한 번 공연장을 채웠고, 그 목소리에 응답하듯 미유가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노래가 아닌 대화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의 환호는 본공연 못지않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질문으로 이어진 이야기들, 무대 밖의 미유

토크쇼는 우선 간단한 소감으로 시작되었다.

미유는 “긴장했지만, 와주신 분들을 위해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며 공연을 돌아보았다.

이어 나츠코는 사회를 맡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윗분이 ‘나츠코가 하면 어떻겠냐’고 하셨다”고 말하자, 나츠코는 “그건 윗분 생각 아니냐”며 웃음을 자아냈다. 두 사람은 사적으로도 친한 사이로, 10년 전부터 알고 지낸 관계라고 했다. 나츠코는 미유의 15살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며, 지금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간단한 팬 경력 조사가 이어졌다.

처음 온 사람부터 6개월 이내, 1년 이내, 5년 이내, 10년 이상까지. 손을 들며 확인하는 이 짧은 설문만으로도, 이 공연장이 얼마나 다양한 시간의 팬들로 채워져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Q&A로 드러난 생각들

애프터 토크쇼는 미리 받아둔 질문을 랜덤으로 뽑아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형식만 놓고 보면 흔한 Q&A였지만, 실제로는 공연의 연장선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노래로 이미 한 차례 마음을 열어 보인 뒤였기에, 질문과 답변 하나하나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정의 여운처럼 이어졌다. 필자는 이번에 질문을 남기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지만, 함께 온 일본인 지인이 남긴 질문이 연이어 3개나 뽑히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객석 한쪽에서 그 흐름을 충분히 함께 누릴 수 있었다. 질문이 읽힐 때마다 괜히 더 집중하게 되었고, 답변이 끝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한국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 미유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정확한 가게 이름은 바로 떠오르지 않는 듯했지만, 매니저와 함께 갔던 삼겹살집이 정말 맛있었다는 기억은 또렷해 보였다. “정말 맛있었어요”라는 짧은 말이었지만, 말끝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섞였고, 그 웃음 속에는 여행 중의 한 장면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했다. 이어서 맘스터치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객석의 반응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한국에서 먹었던 맘스터치가 굉장히 맛있었고, 일본에도 매장이 생겼다고 들었다는 말은, 단순한 음식 이야기이면서도 한국에서의 경험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패스트푸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팬들에게는 그가 어떤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글로벌 아티스트로서 스스로에게 가장 필요한 과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차분해졌다. 미유는 망설임 없이 언어 연습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만큼,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소통의 핵심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가창력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라이브에서 충분히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더 높여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분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된 결과보다 과정에 더 많은 의미를 두고 있는 태도, 그리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짧은 답변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가장 오래 고민한 질문은, 라이브에 직접 오는 팬과 음악만 듣는 팬 중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이었다. 미유는 이 질문 앞에서 잠시 웃으며 “고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 짧은 웃음 뒤에는 진짜 고민이 담겨 있는 듯했다. 결국 그는 라이브에서 팬들과 눈을 마주치고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소통하는 시간이 자신에게는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 답변이 나왔을 때, 공연장 안에는 묘한 공감의 공기가 흘렀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왜 이 공연장에 와 있는지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확인받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라이브라는 공간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날 뽑인 질문과 답변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 곡을 만들 때 멜로디와 가사 중 무엇을 먼저 생각하나요? → “80% 정도는 멜로디를 먼저 생각합니다. TERMINAL도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 조금 센치멘탈해지면서 멜로디가 떠올랐어요.”
  •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 “한국과 일본 배우가 나온 Eye Love You를 좋아해요. 영화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좋아합니다.”
  • 솔로곡은 얼마나 있나요? → “약 50곡 정도 있어요. 아직 발매되지 않은 곡도 많고, 아이폰에만 있는 곡들도 있는데 언젠가는 들려드리고 싶어요.”
  • 아침형 인간인가요? → “학생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7시 59분에 일어나서 혼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상경하고 나서는 오히려 아침이 괜찮아졌어요.”
  • ‘검은 심장’이라는 곡명은 어떻게 지었나요? → “가사를 쓰고 문득 떠올랐어요. 윗분에게 이야기했더니 제목을 그렇게 바꾸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 가고 싶은 곳은? → “해외는 내슈빌, 일본에서는 오키나와요.”
  • 한국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 “매니저와 갔던 삼겹살집이 정말 맛있었어요. 그리고 맘스터치도 너무 맛있었어요. 일본에도 생겼다고 들었어요.”
  • 글로벌 아티스트로서의 과제는? → “언어 연습이 가장 중요하고, 가창력도 더 높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 라이브에 오는 팬 vs 음악만 듣는 팬, 하나를 고른다면? → “고르기 어렵지만, 라이브에서 팬들과 눈을 마주치며 소통하는 게 좋아요.”

완전히 끝난 밤, 그러나 남은 여운

이 외에도 더 많은 질문과 이야기가 오갔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이 정도였다. 그렇게 애프터 토크쇼까지 모두 마무리되며, 이 날의 공연은 비로소 완전히 끝이 났다.

노래로 시작해 말로 마무리된 이 밤은, 단순한 콘서트라기보다 하나의 긴 대화처럼 느껴졌다. 무대 위와 아래의 거리가 가까웠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되었다. 이번 도쿄 여행의 중심에 이 공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 순간만큼은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 장소 정보 — 하라주쿠 RUI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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