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여행 5일차 아침이 밝았다. 전날 밤에는 빅토리아 피크에서 야경을 보고 늦게 숙소로 돌아왔고, 이날은 홍콩 도심의 화려한 얼굴보다 조금 더 생활감 있는 지역을 걸어보기로 했다. 숙소가 있던 곳은 홍콩 섬 서쪽의 사이잉푼(Sai Ying Pun). 관광 가이드북 첫 장에 크게 등장하는 지역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궁금했던 동네였다.
숙소 문을 나서 몇 분만 걸어도 바로 거리 풍경이 시작됐다. 따로 이동을 위해 지하철을 탈 필요도 없었다. 여행 중 이런 순간이 좋다. 유명 명소를 찾아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머무는 동네 자체가 하나의 여행지가 되는 순간 말이다.


센트럴과 가깝지만 완전히 다른 분위기
사이잉푼은 홍콩 섬 중심 지역인 센트럴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동네다. MTR 기준으로는 센트럴에서 몇 정거장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다. 지도만 보면 도심 생활권이 거의 이어져 있다고 봐도 될 정도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분위기는 꽤 다르다. 센트럴이 유리 외벽의 고층 빌딩, 글로벌 금융회사, 정돈된 오피스 거리의 이미지라면, 사이잉푼은 훨씬 생활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 있다. 오래된 주거 건물, 작은 상점, 시장, 경사진 골목, 낡은 간판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같은 도시 안에서도 지하철 몇 분 차이로 공기가 달라진다는 점이 홍콩의 재미이기도 하다.


오래된 홍콩의 색을 간직한 거리
사이잉푼을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건물들이다. 반듯하게 새로 지어진 타워형 건물도 있지만, 그 사이사이에 세월이 느껴지는 주상복합 건물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파스텔톤 외벽이 바랜 채 남아 있는 건물, 창문마다 다른 커튼이 걸린 집, 베란다에 빨래가 널린 풍경, 아래층에는 작은 식당과 가게가 들어선 구조. 이런 모습이 겹쳐지면서 “지금도 사람이 살아가는 홍콩”의 장면이 만들어진다.
관광지에서 보는 화려한 홍콩과는 조금 다르다. 대신 더 현실적이고, 더 생활에 가까운 풍경이다.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의 구조
홍콩 섬 서부 지역은 평지가 넓지 않다. 바다와 맞닿은 도로 뒤로 곧바로 경사가 시작되고, 건물들은 그 지형을 따라 층층이 올라간다. 사이잉푼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도 길은 자연스럽게 오르막이 되고, 계단과 경사로가 이어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네 산책처럼 시작했는데, 어느새 계속 오르내리며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도 이런 지형 덕분에 가끔 뒤를 돌아보면 건물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낮은 지대와 높은 지대가 겹쳐지는 입체적인 도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평면적인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건어물 향이 남아 있는 무이퐁 스트리트
사이잉푼을 이야기할 때 빼놓기 어려운 곳이 무이퐁 스트리트(Mui Fong Street)다. 이 일대는 전통적인 해산물·건어물 상점으로 알려진 거리 가운데 하나다.
큰길에서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분위기가 또 달라진다. 현대적인 프랜차이즈 대신 오래된 상점들이 나타나고, 가게 앞에는 각종 건어물과 약재, 말린 식재료가 진열되어 있다. 거리에는 특유의 향이 퍼지고, 상인들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인다.
처음 방문한 여행자에게는 낯선 풍경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이야말로 여행지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생활의 결이다. 예쁘게 꾸며진 쇼핑몰보다 훨씬 강하게 기억에 남기도 한다.
새로 뜨는 동네의 얼굴도 함께 있다
사이잉푼은 오래된 동네로만 남아 있는 곳은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카페, 베이커리, 브런치 가게, 감각적인 레스토랑이 들어서며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특히 High Street, Third Street, Centre Street 일대는 젊은 감성의 가게들이 하나둘 자리 잡으며 산책 코스로도 주목받는 지역이 되었다. 오래된 주택가와 새로 들어온 가게들이 한 블록 차이로 공존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그래서 사이잉푼은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보이는 동네다. 한쪽 골목에서는 시장 상인이 짐을 나르고, 다른 골목에서는 커피를 든 사람들이 브런치 가게 앞에 줄을 선다.

작은 에스컬레이터와 동네의 리듬
센트럴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관광 명소라면, 사이잉푼의 야외 에스컬레이터는 조금 더 실용적이다. 주민들이 오르막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한 생활 인프라에 가깝다.
규모도 훨씬 소박하고 화려함도 없다. 하지만 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주변 주거지와 골목을 바라보면, 이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사진 명소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냥 출근길이고 장보러 가는 길이다. 그런 점이 오히려 더 인상적이다.
시장과 식당이 많은 생활형 동네
사이잉푼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먹는 동네”라는 점이다. 비싼 파인다이닝보다 생활 밀착형 식당이 많고, 로컬 주민들이 실제로 이용하는 가게들이 많다.
정육점, 채소 가게, 생선가게, 반찬가게 같은 시장 요소들이 살아 있고, 그 사이에 면집, 죽집, 딤섬집, 차찬텡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관광객 가격이 붙은 지역과는 다른 느낌이 있다.
나 역시 이 날 아침, 숙소 근처를 걷다가 자연스럽게 식당을 찾게 되었고, 이 지역에서 미슐랭 가이드 빕 구르망에 오른 가게를 방문할 수 있었다. 일부러 먼 곳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머무는 동네 안에서 좋은 식당을 만난 셈이다.
영화 세트장 같은 홍콩의 질감
사이잉푼을 걷다 보면 이상하게 영화 속 공간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너무 깨끗하게 정리된 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낙후된 것도 아니다. 오래된 건물과 좁은 골목, 네온 간판, 경사진 길, 바다와 언덕이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레트로하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디스토피아 같다고 느낀다. 나 역시 걷는 동안 어딘가 SF 영화의 배경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도시가 너무 정돈되면 개성이 사라지기도 한다. 사이잉푼은 아직 그런 날것의 질감이 남아 있는 동네였다.


관광객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유
이 지역은 침사추이나 센트럴처럼 “무조건 가야 하는 명소”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홍콩을 조금 더 깊게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꽤 매력적인 선택지가 된다.
화려한 야경, 럭셔리 쇼핑몰, 유명 관광지를 이미 봤다면 다음에는 이런 동네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걷는 것만으로 재미가 있고, 예상하지 못한 가게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홍콩을 처음 가더라도 시간이 조금 여유 있다면, 반나절 정도는 사이잉푼 같은 지역에 써볼 만하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아침 산책
이날 사이잉푼은 거창한 일정으로 방문한 곳이 아니었다. 숙소 근처였고, 아침 시간이었고, 자연스럽게 걸어나간 동네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방문이 더 좋았다. 무언가를 반드시 봐야 한다는 압박 없이 천천히 걷고, 골목을 보고, 동네 사람들의 하루가 시작되는 풍경을 보는 시간. 여행지에서 이런 시간이 의외로 오래 남는다.
홍콩의 화려한 얼굴은 밤에 많이 보았다. 사이잉푼에서는 낮의 홍콩, 생활의 홍콩, 오래된 홍콩을 본 느낌이었다.
📌 홍콩 사이잉푼 (Sai Ying Pun)
- 📍 주소: Sai Ying Pun, Hong Kong Island, Hong Kong
- 🚇 MTR Sai Ying Pun Station 이용 가능
- 🌐 인근 지역 : Centre Street, High Street, Third Street, Mui Fong Street
- 🕒 지역 상시 방문 가능 (개별 상점 운영시간 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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